백남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난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 작곡가, 전위 예술가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932년 7월 20일에 태어나, 친일파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막내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 종로구 창신동에서 18세까지 살며 수송국민학교와 경기 제1 고등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시기에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한국 작곡가 김순남에게도 사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교육은 그가 나중에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1949년, 백남준은 홍콩 로이덴스쿨로 전학한 후 한국 전쟁 발발 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습니다.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하여 미술사학 및 미학을 전공했지만, 현대 작곡가들에게서 작곡과 음악 사학을 공부하며 졸업 논문으로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를 제출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현대 음악과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그의 예술적 경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56년 독일로 유학한 백남준은 뮌헨 대학교와 쾰른 대학교에서 서양 건축, 음악사,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로 옮겨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한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하며 존 케이지와의 만남을 통해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1950년대부터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 음악 현장에서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로 불리며 활발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파괴하거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등의 퍼포먼스로 주목받았습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그가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형태의 표현을 탐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1년, 백남준은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하며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어 비디오 아트의 초기 형태를 선보였습니다. 이 전시는 즉흥 음악과 무음악의 발상에 기반한 퍼포먼스와 함께 다양한 설치 작업이 공존하는 자리였습니다. 백남준은 이 전시를 ‘동시성’, ‘참여’, ‘임의 접속’ 등 16개의 테마로 큐레이팅하여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1964년 일본으로 돌아가 '로봇 K-456'을 제작한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65년 소니의 포타팩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1967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성적인 코드를 담은 공연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따라 뉴욕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등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백남준은 이후에도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다양한 예술 활동을 전개하며 미디어 아트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설치 미술로 변환하여 'TV 붓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의 대표작을 선보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생명의 상징을 전자적으로 결합하여 현대 사회의 새로운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TV 붓다'는 그의 초기 비디오 설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문화적 환경이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호의적으로 변화하면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다양한 전시에 활발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 뉴욕 에버슨 미술관 개인전과 함께 '비데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이라는 저작을 발표하여 미디어 아트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과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하며 예술 세계의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행사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등 많은 예술가가 참여하였고, 2천 5백만명이 시청했습니다. 이후 '위성 아트' 3부작이 이어져 새로운 부족사회를 실감하게 했습니다.
1984년 도쿄 소게쓰홀에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으로 참여한 '코요테 콘서트 II'가 열렸고, 이들의 공동 관심사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후 계획은 보이스의 죽음으로 미완으로 끝났습니다. 1992년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0만명이 관람한 첫 전시로 기록되었습니다. 1993년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칭기스칸의 복권'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의 태동에 기여하며 한국 미술의 국제적 진출을 도왔습니다.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2006년 1월 29일 마이애미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 안치되었습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서 현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예술가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반영한 작품들을 통해 관객과 소통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유산은 비디오 아트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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