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술
한반도 및 주변 지역에서 발생했던 미술을 말합니다.
고분벽화, 불화, 문인화, 산수화 같은 평면 시각 매체 예술과 불상, 석탑, 도자기 같은 입체 시각 매체도 포함됩니다.
한국 미술사에서 미술은 서예 같은 다른 시각예술이나, 궁궐, 한옥 같은 건축 예술, 시조, 향가와 같은 문학예술, 판소리, 탈춤과 같은 공연 예술과 연관을 맺으며 발전해 왔습니다.
대한 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양회화, 사진, 영화 등이 전래되고, 동양화의 발전과 서양화의 시도를 통해 근대 미술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광복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추상화, 개념미술 작가의 활동과 더불어 한국의 현대 미술계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부터는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사회 변화의 비판적 해석을 정립한 민중미술이나, 방송 문화와 더불어 비디오아트가 시도되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 인터넷 보급으로 미디어아트가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미술의 역사
-선사 시대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하지 않고 유랑 생활을 했습니다.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는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발견됐습니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와 관련된 연구에서,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5만 년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공예품 중 대표적인 것은 토기로 초기부터 경작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토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식량을 저장하기 시작했고 미적으로 물건을 꾸미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토기는 야외에 구덩이를 파고 700도 정도의 온도로 가열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토기는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인 덧무늬토기에 이어 빗살무늬토기로 이어졌으며 기원전 2000년경이 되면 문양이 사라지고 실용성이 강조된 민무늬토기가 등장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토기가 커지고, 장식적인 목적보다 실용적인 목적이 더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요약하면 구석기 시대에는 주로 돌을 깨서 만든 석기를 사용하며 유목 생활을 했던 반면, 신석기 시대에는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고조선 시대
고조선 시대는 청동기와 철기를 아우르는 시대로 기원전 2000년 경에서 기원전 300년 경까지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구리는 구하기 힘든 물품이었으므로 청동기 물품은 주로 동검, 동경(거울), 방물 등의 제의 용구가 많이 발견됐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사람들은 집단 취락을 만들어 거주하기 시작했고 관련 유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인돌을 만들고 그 안에 청동기 등의 용품들을 매장하였습니다. 청동기 제의 용구 집단취락, 고인돌 같은 사례로 비추어 청동기 시대에는 점차 계급이 발생하고 제사장 중심의 국가체제가 성립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고조선의 문화권이었던 곳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출토됩니다. 이를 통해 고조선의 문화권 영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곡옥, 돌칼, 붉은 간 토기 등이 발견됐으며 제의 용구만을 보면 고조선은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300년 경에 철기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고조선 시대는 청동기의 등장과 함께 집단생활, 계급 사회의 형성, 그리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특히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영역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이며, 다양한 제의 용구는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 문화와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이후 철기 시대를 맞이하며 고조선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삼국 시대
부족국가 수준이었던 원삼국시대가 지나고 기원전 1세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야는 연맹 국가를 유지하며 562년까지 존속하다 신라에 흡수됩니다.
--고구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졸본성을 도읍으로 건국해, 서기 3년 환도산성으로 천도하였습니다. 그 후 평성인 국내성으로 옮겼다가 427년 평양으로 다시 천도했습니다. 전성기인 광개토 대왕 때에는 개마 무사를 운영하며 영토를 넓혔습니다. 또한 북위와 경쟁하면서 불교와 한자를 수용하고 왕권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고구려 문화를 잘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고구려 고분군이 있습니다. 2004년 북한은 평양 인근에 있는 후기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신청했으며 같은 해 중화인민공화국은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 군이라는 이름으로 지린성 지안 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전기 고구려 고분과 오녀산성(졸본성), 환도산성, 국내성 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했습니다. 고구려 고분에 남아있는 고분벽화는 한반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회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입니다. 이 고분벽화에는 당시 계급 모습, 의복, 건축양식, 부엌 모습, 수레, 수렵, 군사 등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고구려는 일본 호류지의 벽화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약하면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강성했던 고대 국가입니다. 졸본성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기며 영토를 확장했고, 광개토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고구려 문화는 고분벽화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는데,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는 한국 회화의 기원이자, 일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성립된 국가로 백제의 미술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양(남조) 및 일본과 교류했습니다. 백제 금동대향로, 미륵사 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 사리장엄구, 무령왕릉 출토 유물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전라도 영산강 지역의 문화는 백제 지배충이 자리 잡았던 경기도나 충청도의 문화와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을 보면 이 지역 호족들은 백제 지배층과 별도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거나, 백제 지배층으로부터 봉건적인 지위를 인정받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외적으로 일본과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왕인 박사의 이야기나 칠지도의 사례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무덤(전방후원분)이 백제 영역 내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요약하면 백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면서도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특히, 백제의 영역 내에서도 지역별로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으며, 백제 지배층과 지방 호족 간의 관계는 복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초기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자리 잡아 불교 등 외국 문물을 수용하는 속도가 가장 느렸으나, 이후 당의 힘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초기 신라는 가야와 함게 각종 모양의 도기를 생산하였으며, 특히 국보 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릇의 말탄 인물 모습은 당시의 생활상을 추측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외에도 도기에 토우를 장식한 토우 장식 장경호 또한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와 생활상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신라인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성행위를 하는 모습뿐 아니라 코끼리나 개미핥기 같은 동물의 모습도 토우로 만들어 붙었습니다.
신라 경주는 수백 년간 신라의 수도였으며, 실크로드를 다라 형성된 국제 교역망의 종착지였습니다. 경주 왕릉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서역의 영향을 받은 문양이 보이며, 특히 경주 98호 분 남분 출토 유리병은 로마 유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지중해에서 신라까지 물품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코끼리 같은 동물들의 모습을 토우로 표현한 것도 이런 국제적인 교역망 덕분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외에 경주에 있는 왕릉에서는 금관과 금제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흉노족과 신라인 사이에 연관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금제 허리띠에 붙어있는 장신구들이 유목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며, 신라 왕릉에서는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현재 유일한 현존하는 신라시대 회화입니다.
요약하면 신라는 초기에는 다른 삼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처졌지만, 후기에는 국제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도기, 금관, 회화 등의 유물을 통해 신라인들의 생활상과 문화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가야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 국가 단계에서 신라에 흡수되었습니다. 가야의 미술품으로는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대량의 도기들이 유명합니다. 이외에도 고구려와 비슷하게 가야 사람들은 다양한 마구와 판갑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남북국시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한 기원후 698년부터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글을 보내 항복한 935년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같은 시기 북쪽 만주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가 거란과 대립하면서 성장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은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으며, 석굴암은 건축적으로 세밀히 계산해 조성한 인공 석굴이며, 이는 사암이 많은 중국 서부 지역과 달리 화강암이 많은 한반도의 상황에 맞춰 조성된 것입니다. 석굴암이 본존불은 신라시대 전성기 불상 조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경주 남산에는 여러 불상과 석탑들이 산재해있으며 현재 경주 일대는 경주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출신의 유민들이 지배계층을 차지하고 말갈 계통 민족들이 피지배계층을 구성한 국가입니다. 발해를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지린성의 룽터우 산 고분군 정효 공주 묘가 있습니다. 발해 3대 왕인 문왕은 딸이었던 정효 공주와 정혜 공주가 죽자 각각 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정효 공주묘에는 인물들의 모습이 벽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려
고려 왕조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존속했습니다. 고려왕조는 초기에는 거란 및 여진과 대립하고, 후기에는 원의 간섭과 왜구의 약탈에 시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귀족과 서민계층을 아우르는 국가 이념을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 시대 불교 세력은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는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분위기를 띄었고, 벽란동는 동남아나 페르시아,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이 교역을 했습니다. 쌍화점 같은 고려 가요를 보면, 이 시기 사회 분위기가 이후 조선시대보다는 자유분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청자는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 중 하나입니다. 비취(녹색 옥) 같은 색을 의미하는 비색을 특징으로 하는 고려청자는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잡았던 1050년 경부터 무신정권 말기인 1250년 경까지 제작되었습니다. 문벌 귀족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면서 세련된 모양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이후 무신정권기의 고려청자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형태와 문양을 띄게 됩니다. 후기의 청자는 청자비룡형 주자(주전자)처럼 복잡한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지거나,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처럼 복잡한 상감 기법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습니다.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고려청자 제작 기술은 쇠퇴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를 흉내 낸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고려 시대 상인들에게 도자기는 주요 교역품목이었으나, 고려청자는 주로 고려 안에서만 유통되었습니다. 외국 상인들은 주로 송이나 원의 백자를 교역 대상으로 삼았으며 국내에서 유통되는 고려청자는 주로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에서 생산되어 개경으로 배를 통해 운반되었는데, 이 배가 지금의 신안 해저유물 매장 해역에 침몰하기도 했습니다. 이 해역에서 발굴된 청자들을 보면 색이 어둡고 대량생산된 흔적이 남아있는 청자들이 많아 당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청자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려불화가 유행하였습니다. 고려 시대의 귀족들은 불화를 집안의 불감에 봉안해 섬겼으며 고려불화는 주로 아미타여래와 그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 및 지장보살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설법을 설한다는 부처이며, 관음보살은 세상 모든 중생들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구원한다는 보살이고, 지장보살은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중생들을 지옥에서 구제한다고 알려진 보살입니다. 세 여래와 보살 모두 서방정토신앙의 구원 사상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 불화는 세밀한 붓 터치와 뛰어난 반투명한 색 묘사가 특징입니다. 이후 고려 후기에 왜구에 의해 불상과 함께 약탈되었고, 근대에 들어 서양과 교역하면서 다시 팔려나가, 현재 뛰어난 고려불화들은 외국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고려 시대 하층민들은 미륵신앙을 믿었습니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이런 고려 시대 서민들의 믿음을 반영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은진미륵으로도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시대 귀족들의 세련되거나 화려한 미는 보이지 않고, 대신 토속적이면서 둔중하고 강한 위압감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화강암의 물질감이 주는 무게감은 당시 서민들이 선호한 '강한 미륵부처'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고려 시대는 불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으며, 국제 교류를 통해 개방적인 사회를 형성했습니다. 고려청자와 불화는 고려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산이며, 이 시대의 문화적 다양성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양반들은 숭유억불 정책을 따랐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삼강행실도같이 유교의 이념을 강조하는 서적이 출판되어 보급되었고,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각종 예법 등이 의궤 같은 기록으로 남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교는 왕비나 사대부 여인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성행하였지만, 더 이상 불교는 고려 시대처럼 귀족적이고 화려한 모습을 띠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찰도 점차 도시보다 산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불화 양식은 점차 도식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무속신앙을 받아들여 화려한 색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칠성당 같은 무속 신들이 사찰에 봉안되기도 하였습니다.
미술에서는 화려한 불화보다 중국의 유학자들이 선호한 문인화의 영향이 강해졌고, 그 결과 조선에서도 화려한 채색화보다는 수묵화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양반 사대부 사이에서는 사군자나 산수화가 유행하였습니다. 소재는 유교의 주요 이야기나, 도가의 이야기를 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회화가 중국 산수화 기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바위의 모습은 한반도에는 없는 모습으로 도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소재 면에서는 도원경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화려한 채색화를 배제하는 경향은 특히 명나라 동기창의 남북 종론에 따라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동기창은 채색화를 북종화(북쪽 이민족의 그림)로, 수묵화를 남종화(한, 송, 명 같은 중국 민족의 그림)로 나누고 남종화만을 권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아직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경향이 심화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여성이 자유롭게 집 밖으로 나다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신사임당 같은 여성 화가들은 초충도 등을 그려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성리학적 이념은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고려 시대와는 다른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영조와 정조가 집권한 시기에 조선 문화는 짧은 중흥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정선은 옛 중국 그림을 모방해 도식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를 남겼습니다. 김홍도는 당시 서민들의 풍속을 익살스러운 필채로 그림에 담았으며 신윤복은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향락 생활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이외에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민화가 발달하기도 하였으며 도자기를 보면 조선 전기에는 주로 분청사기가 만들어지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백자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약하면 조선 시대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유교적 가치관이 강조되었고, 이는 미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문인 화가 발달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등장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미술 양식을 형성했습니다. 불교는 쇠퇴하고 유교가 국가의 중심 이념이 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와 무속 신앙이 혼재되어 나타났습니다.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윤복 : 조선의 화가가 그린 사랑과 풍속 (0) | 2025.01.15 |
---|---|
이중섭 :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 (1) | 2025.01.14 |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1) | 2025.01.14 |
한국의 미술 역사 : 근, 현대 (1) | 2025.01.14 |
예술이란 무엇일까? (1) | 2025.01.14 |